2008년 08월 02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사법인〃
제가 반야누리 98년 12월호에서 사법인에 대하여 정리했던 글 옮겨 옵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사법인〃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나의 無常性을 체득해야 한다. 피는 꽃 속에서 봄의 숨결을 느낄 뿐 아니라 나에게는 몇 번이나 더 이것을 음미할 자유가 있는가를 지그시 되씹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데는 길이 있다. 올바른 길, 삿된 길, 무의미한 길, 보람찬 길, 갖가지의 행로가 있을 수 있다. 사성제나 팔정도에서 '올바른 길'을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보다 간결하게 압축한 부처님 가르침으로 사법인이라는 것이 있다.
산스크리트어의 다르마 무드라 즉,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란 뜻이다. 법이란 물론 부처님의 교법을 말하고 인장은 부처님 말씀의 원래 취지와 일치하는 특징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어떤 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3법인 또는 4법인에 맞추어 보고 법인의 사상에 합치하는가 않는가를 엄밀히 조사했다고 한다. 법인의 사상과 일치하면 부처님 말씀이고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이 된다.
사법인 즉, 네 가지 부처님 교법의 도장이란,
①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행위는 영원하지 못하다. 시간적으로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② 제법무아(諸法無我) : 어떠한 사물이든지 변하지 않는 영원의 實體는 없다. 즉 내면적으로 보아도 모든 존재는 흘러간다는 표현이다.
③ 일체개고(一體皆苦) :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을 말한다.
④ 열반적정(涅槃寂靜) : 위의 도리를 깨달았을 때 얻는 평안의 경지, 즉 일체개고와는 정반대의 입지를 가리킨다.
'생멸변화하는 일체의 현상은 무상하고 일체법은 나라는 실체가 없으니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 고통이다. 그러나 앞의 세 법인을 여실히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열반은 고요하다'는 뜻이다. 이 사법인에서 일체개고를 빼면 삼법인이된다.
삼법인을 설명하면서 부처님은 모든 사물의 무상을 강조한다. 무상을 분석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끌어다 쓴다. 번뇌가 며한 곳, 즉 열반의 이상으로 향하기 위해서 일체법의 무상·무아·고통·공을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사법인의 형태가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번뇌가 멸한 이상의 상태가 열반의 상태라고 한다면 무상, 무아, 고통, 뒤에 열반적정이 당연히 붙어야 할 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관해야 할 대상이고 마지막의 열반적정은 성취해야 할 이상이다.
사법인의 첫 번째 제행무상은 모든 삼라만상의 일체 존재가 찰나찰나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음을 관하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 무상함을 알려 주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바로 무상게이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다. 해석해 보면 '모든 것은 무상하니 바로 생멸법이다. 나고 죽음의 분별을 다 쉬어버리면 일체 존재가 적멸한 가운데 법열이 나온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것을 의역하면 '꽃은 피면 반드시 지고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다. 피는 꽃과 떨어지는 낙화를 동시에 같이 묻고 삶과 죽음을 함께 묻으면 고요한 가운데 은근한 즐거움이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무상의 원칙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확실히 증명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지식을 주기 위해서 무상관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참다운 삶, 가치있는 삶, 영원한 삶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기쁠 때 보다 슬플 때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좋은 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진정한 자신을 찾고 진정한 자신을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아주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아니면 자기 자신이 갑자기 불구의 몸이 되었을 때 깊은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도 부처님은 인간 마음의 흐름이 대개 이와 같음을 알기 때문에 무상관을 사법인 중에 가장 먼저 두었을 것이다.
제법무아에서 제법이란 현상의 일체법을 말한다. 이 제법이란 말을 유위법이란 말로 바꾸어도 된다. 제행무상에서의 제행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일체법, 일체의 사물, 모든 사건과 물건이라는 말로 써도 좋다. 제법무아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거나 나가 없는 상태에 있다'라는 뜻이다. 무아라는 말도 종종 사용되므로 '모든 것은 무아이다'라고 풀어도 되겠다.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왜 나가 없느냐'는 것이다. 부처님의 5온, 12처, 18계를 설명하시면서 일체법을 잡을 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신다. 오온에서 나타나는 물질과 정신,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그 둘의 접합이 만드는 것만을 일체법이라고 인정한다.
또한 우리는 지금 분명히 나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같이 나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법인의 두 번째는 나가 없다고 가르치느냐는 아주 당연한 물음이 나온다.
연기법에서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가 기본이다. 오온, 12처, 18계에서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색·수·상·행·식이라는 요소의 화합이거나 감각기관과 그 대상의 화합에서 일어나는 연기관계라고 알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화합된 것이고 상호 의존관계에 의해서 존재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우리는 배웠다.
실체가 없는 이유는 사람을 포함해서 일체 만물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대를 전제하고 상대에 의존하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하더라도 홀로의 나가 아니라 상대에게 의존한 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기법의 공식은 모든 것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이다. 각 시대에 따라 종파에 따라 무아라는 말을 공이라는 말이나 무라는 말 또는 다른 말로 바꾸어 부르기는 하지만, 연기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불교에서 이 무아사상은 모든 가르침의 기본을 이룬다.
일체개고는 제행개고나 일체행고라고도 부른다. 일체가 다 괴롭다는 말은 제행 즉, 모든 행하는 것 또는 변해가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行'자는 다같이 변천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제행이라는 말이나 일체행이라는 말이 다같이 변천하는 것을 모든 것을 나타낸다. 일체개고의 괴로움에는 세가지가 있다. 苦苦, 行苦, 壞苦이다. 즉 괴로움 자체의 고통과 시간적으로 무상하게 변하는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공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 고통이다. 허나 어떤 고통은 꼭 시간적으로 변화하는데서 오는 고통이고 다른 고통은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데서 오는 고통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가지 고통이 한편으로는 시간적 무상에서 오는 행고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루어졌던 것이 부서지는데서 오는 괴고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고통은 고고·행고·괴고의 세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생에게 있어서는 무상과 무아가 그대로 고통이다.
무상과 무아가 범부중생에게 있어서는 고통이 되는데, 그 통의 여실한 관찰이 어떻게 열반적정이 되느냐는 의문이 떠오른다. 사법인 중에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지나 일체개고에 나오는 괴로움을 다루면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런 질문이 일어날 수도 있다. 즉 고통을 여실히 관찰한다고 해서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거나 초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렇다.
고통을 여실히 관찰한다는 것이 고통을 초월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천성을 믿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중생의 삶이라는 실타래가 뒤얽힘으로써 고통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인간의 천성은 자연적으로 그 뒤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성적인 사람 마음의 경향을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장, 진여, 자성청정심 또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는 고통을 여실히 보면 그것을 풀고자 하는 본능적 성향이 있다.
서양의 자연주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물은 유전한다. 아무도 동일한 산천에서 다시 목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흘러가는 물도, 목욕하는 나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불변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영겁을 두고 뜨고 지는 태양까지도 변하고 있다. 움직임 없는 바위들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자꾸 외면하려고 한다.
그래서 고향이 옛 모습이 아님을 서러워하고 나이들어가는 동창들의 모습에서 감회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사물의 속성이다. 뒤집어 말하면 변하기 때문에 사물은 질서와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만약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썩고 만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변해야 썩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따져 보더라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연계의 여러 현상 또한 모두 영원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고집을 부린다. 또 영원하기를 바란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이와 같은 탐착심은 매일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가르침에 맞추어 생각해 볼 때 세상의 어리석음을 한탄할 필요도 없고 비웃을 까닭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 진리를 어떻게 체험하며 그 경험을 생활 속에 실현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 일체개고가 되기도 하고 열반적정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입으로 제행무상을 뇌일 수 있다. 머릿 속으로 제법무아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관념일 수가 없다. 생활 속에 녹아 흐르도록 삶의 질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평범해 보이던 일상이 새롭게 다가설 수 있는 예지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겸손한 삶의 태도를 통해 인격은 성숙해질 수 있다. 무작정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인생, 과거를 신주단지처럼 가슴에 품어 안고 사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 바로 그때 진실한 자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사법인〃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나의 無常性을 체득해야 한다. 피는 꽃 속에서 봄의 숨결을 느낄 뿐 아니라 나에게는 몇 번이나 더 이것을 음미할 자유가 있는가를 지그시 되씹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데는 길이 있다. 올바른 길, 삿된 길, 무의미한 길, 보람찬 길, 갖가지의 행로가 있을 수 있다. 사성제나 팔정도에서 '올바른 길'을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보다 간결하게 압축한 부처님 가르침으로 사법인이라는 것이 있다.
산스크리트어의 다르마 무드라 즉,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란 뜻이다. 법이란 물론 부처님의 교법을 말하고 인장은 부처님 말씀의 원래 취지와 일치하는 특징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어떤 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3법인 또는 4법인에 맞추어 보고 법인의 사상에 합치하는가 않는가를 엄밀히 조사했다고 한다. 법인의 사상과 일치하면 부처님 말씀이고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이 된다.
사법인 즉, 네 가지 부처님 교법의 도장이란,
①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행위는 영원하지 못하다. 시간적으로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② 제법무아(諸法無我) : 어떠한 사물이든지 변하지 않는 영원의 實體는 없다. 즉 내면적으로 보아도 모든 존재는 흘러간다는 표현이다.
③ 일체개고(一體皆苦) :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을 말한다.
④ 열반적정(涅槃寂靜) : 위의 도리를 깨달았을 때 얻는 평안의 경지, 즉 일체개고와는 정반대의 입지를 가리킨다.
'생멸변화하는 일체의 현상은 무상하고 일체법은 나라는 실체가 없으니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 고통이다. 그러나 앞의 세 법인을 여실히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열반은 고요하다'는 뜻이다. 이 사법인에서 일체개고를 빼면 삼법인이된다.
삼법인을 설명하면서 부처님은 모든 사물의 무상을 강조한다. 무상을 분석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끌어다 쓴다. 번뇌가 며한 곳, 즉 열반의 이상으로 향하기 위해서 일체법의 무상·무아·고통·공을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사법인의 형태가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번뇌가 멸한 이상의 상태가 열반의 상태라고 한다면 무상, 무아, 고통, 뒤에 열반적정이 당연히 붙어야 할 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관해야 할 대상이고 마지막의 열반적정은 성취해야 할 이상이다.
사법인의 첫 번째 제행무상은 모든 삼라만상의 일체 존재가 찰나찰나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음을 관하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 무상함을 알려 주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바로 무상게이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다. 해석해 보면 '모든 것은 무상하니 바로 생멸법이다. 나고 죽음의 분별을 다 쉬어버리면 일체 존재가 적멸한 가운데 법열이 나온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것을 의역하면 '꽃은 피면 반드시 지고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다. 피는 꽃과 떨어지는 낙화를 동시에 같이 묻고 삶과 죽음을 함께 묻으면 고요한 가운데 은근한 즐거움이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무상의 원칙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확실히 증명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지식을 주기 위해서 무상관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참다운 삶, 가치있는 삶, 영원한 삶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기쁠 때 보다 슬플 때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좋은 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진정한 자신을 찾고 진정한 자신을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아주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아니면 자기 자신이 갑자기 불구의 몸이 되었을 때 깊은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도 부처님은 인간 마음의 흐름이 대개 이와 같음을 알기 때문에 무상관을 사법인 중에 가장 먼저 두었을 것이다.
제법무아에서 제법이란 현상의 일체법을 말한다. 이 제법이란 말을 유위법이란 말로 바꾸어도 된다. 제행무상에서의 제행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일체법, 일체의 사물, 모든 사건과 물건이라는 말로 써도 좋다. 제법무아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거나 나가 없는 상태에 있다'라는 뜻이다. 무아라는 말도 종종 사용되므로 '모든 것은 무아이다'라고 풀어도 되겠다.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왜 나가 없느냐'는 것이다. 부처님의 5온, 12처, 18계를 설명하시면서 일체법을 잡을 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신다. 오온에서 나타나는 물질과 정신,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그 둘의 접합이 만드는 것만을 일체법이라고 인정한다.
또한 우리는 지금 분명히 나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같이 나를 경험하고 있으니까 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법인의 두 번째는 나가 없다고 가르치느냐는 아주 당연한 물음이 나온다.
연기법에서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가 기본이다. 오온, 12처, 18계에서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색·수·상·행·식이라는 요소의 화합이거나 감각기관과 그 대상의 화합에서 일어나는 연기관계라고 알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화합된 것이고 상호 의존관계에 의해서 존재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우리는 배웠다.
실체가 없는 이유는 사람을 포함해서 일체 만물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대를 전제하고 상대에 의존하기 때문에 나가 있다고 하더라도 홀로의 나가 아니라 상대에게 의존한 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기법의 공식은 모든 것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이다. 각 시대에 따라 종파에 따라 무아라는 말을 공이라는 말이나 무라는 말 또는 다른 말로 바꾸어 부르기는 하지만, 연기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불교에서 이 무아사상은 모든 가르침의 기본을 이룬다.
일체개고는 제행개고나 일체행고라고도 부른다. 일체가 다 괴롭다는 말은 제행 즉, 모든 행하는 것 또는 변해가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行'자는 다같이 변천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제행이라는 말이나 일체행이라는 말이 다같이 변천하는 것을 모든 것을 나타낸다. 일체개고의 괴로움에는 세가지가 있다. 苦苦, 行苦, 壞苦이다. 즉 괴로움 자체의 고통과 시간적으로 무상하게 변하는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공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 고통이다. 허나 어떤 고통은 꼭 시간적으로 변화하는데서 오는 고통이고 다른 고통은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데서 오는 고통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가지 고통이 한편으로는 시간적 무상에서 오는 행고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루어졌던 것이 부서지는데서 오는 괴고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고통은 고고·행고·괴고의 세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생에게 있어서는 무상과 무아가 그대로 고통이다.
무상과 무아가 범부중생에게 있어서는 고통이 되는데, 그 통의 여실한 관찰이 어떻게 열반적정이 되느냐는 의문이 떠오른다. 사법인 중에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지나 일체개고에 나오는 괴로움을 다루면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런 질문이 일어날 수도 있다. 즉 고통을 여실히 관찰한다고 해서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거나 초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렇다.
고통을 여실히 관찰한다는 것이 고통을 초월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천성을 믿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중생의 삶이라는 실타래가 뒤얽힘으로써 고통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인간의 천성은 자연적으로 그 뒤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성적인 사람 마음의 경향을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장, 진여, 자성청정심 또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는 고통을 여실히 보면 그것을 풀고자 하는 본능적 성향이 있다.
서양의 자연주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물은 유전한다. 아무도 동일한 산천에서 다시 목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흘러가는 물도, 목욕하는 나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정불변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영겁을 두고 뜨고 지는 태양까지도 변하고 있다. 움직임 없는 바위들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자꾸 외면하려고 한다.
그래서 고향이 옛 모습이 아님을 서러워하고 나이들어가는 동창들의 모습에서 감회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사물의 속성이다. 뒤집어 말하면 변하기 때문에 사물은 질서와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만약 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썩고 만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변해야 썩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따져 보더라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연계의 여러 현상 또한 모두 영원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고집을 부린다. 또 영원하기를 바란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이와 같은 탐착심은 매일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가르침에 맞추어 생각해 볼 때 세상의 어리석음을 한탄할 필요도 없고 비웃을 까닭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 진리를 어떻게 체험하며 그 경험을 생활 속에 실현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 일체개고가 되기도 하고 열반적정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입으로 제행무상을 뇌일 수 있다. 머릿 속으로 제법무아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관념일 수가 없다. 생활 속에 녹아 흐르도록 삶의 질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평범해 보이던 일상이 새롭게 다가설 수 있는 예지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겸손한 삶의 태도를 통해 인격은 성숙해질 수 있다. 무작정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인생, 과거를 신주단지처럼 가슴에 품어 안고 사는 삶을 청산해야 한다. 바로 그때 진실한 자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 by | 2008/08/02 16:08 | 진리의길(불교)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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